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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너를 위해

"........"

어쩌면 당신은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나라는 존재가 희미해질수록 뚜렷해졌던 절망이라는 공포를.
아마 당신은 영원히 나의 절망을 바라겠죠.
당신이 아닌 이가 나의 희망을 바라도 나는 돌아갈 수 없어요.
설령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이가 나를 사랑한다고 속삭인다고 해도요.

그렇다면 나는 그 사람을 절망으로 이끌 거예요.
이건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일이 아니에요.
이건 나를 위한 일이었어요.
당신도 이런 나를 한 번쯤은 이해해줄 거라고 믿어요.

잘 있어요, 나의 영원한 첫 절망.

 

 

 

하시모토 씨. 너는 아무런 서론 없이 내 이름을 어렴풋이 불러왔다. 나는 곧 연기를 내뿜는 담배를 물던 입을 떼었다. 짧게 대답을 하자니 네가 불쑥 손을 내민다. 왜, 뭘. 주세요, 담배. 하? 새 거 주세요, 네? 너 내가 분명히 담배는 탐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안돼요? 그럼 이렇게 하면 되죠. 냉큼 손에 쥔 담배를 뺏어 입에 문 모습에 한숨을 내리쉬니 씨익 웃어 보였다. 나중에 새 거 사서 드릴게요, 네? 됐어, 너 가져. 아싸, 공짜 담배 생겼네요. 너 담배 싫어했었잖아. …네? 분명 내가 처음에 폈을 때에는 그랬지, 끄라고 했었고. 그건‥ 그냥 넘어가죠, 과거는 과거에요. 미묘하게 달라진 표정을 읽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너는 그 흰 얼굴에 띈 인상을 지우려 애썼다.

 그래, 그것은 그저 과거였다. 너와 나의 첫 대면은 확실히 돌아갈 수도 없는 먼 과거여서 돌이킬 수조차 없었다. 너는 틈틈이 과거의 이야기를 지우려 애를 썼다. 오로지 한순간만을 살아가는 사람처럼 미친 듯이 난도질을 해 두고는 알아볼 수 없는 흔적만 만들었다. 그 모습을 굳이 보려 고개를 숙이면 나는 입술을 깨물어 짓눌러야만 했다. 네가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 어떤 시작을 만들어낸 것인지 알 수도 없는데. 너는 자꾸만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듯 과거를 짓누르며 살았다.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엇이 달라졌는지 내가 알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도 분명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너를 자꾸만 믿었다. 네가 괜찮기를 빌었다. 다른 이의 눈물에 똑같이 슬퍼하는 것이 싫었다. 네가 나를 보기를 원했다. 너를 끝없이 신뢰하는 방법이 나의 최선이었다. 나만 너를 바라보는 것은 원하자 않았기에 나를 바라보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너는 눈을 돌릴 것이다. 시선을 나에게서 거두고 공포스러울 정도로 순수한 절망을 선사한 뒤 사라질 너였다. 이미 되돌릴 수도 피할 수도 없는 현실이 어쩌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 만큼, 너를 몹시도 두려워했다. 아니, 사실은 이미 너를 집어삼키곤 네 행세를 하는 가증스러운 절망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감정을 얼굴에서 거둔다. 그러다 보면 깜빡 잠이 들어, 너를 꿈에서까지 마주치게 되는 것이 나에게는 일상이었다. 그래, 오늘도.

 

나는,

   여전히

        꿈을…

 

 

하시모토 씨, 담배 좀 끊어요. 그 맛없는 걸 대체 왜 하는 거예요? 아뇨, 시비가 아니라 진짜 궁금해서. 아무래도 건강이 좋아 보이진 않으시잖아요. 신경 쓰여서요. 신경 쓰지 말라고요? 왜요, 전 진심인데? 어쩌면 같이 나갈 수도 있잖아요, 하시모토 씨. 더 이상 살인을 하실 것 같지는 않아서요. 무슨 근거냐고요? 감이에요, 하시모토 씨도 그랬죠? 하시모토 씨, 여기 보세요. 같이 사진 찍어요! 아, 한 번만요. 네? 다른 분들은 다 있는데 하시모토 씨는 사진이 없어서요. 돈이라면 드릴 수 있는데, 딱 한 번만 찍으면 안 돼요? 아, 진짜‥ 됐어요, 저리 가세요. 진짜 가요? 잠깐만요, 아직 가지 마세요! 됐다! 이제 됐어요, 진짜 가셔도 돼요! 하시모토 씨, 별 진짜 많지 않아요? 또 가려고요? 어차피 안 주무실 거잖아요, 다크써클이 그렇게 내려왔는데 잠을 잘 잔다고 생각하겠어요? 어차피 안 잘거면 얘기나 같이 해요. …여기, 어떻게 생각해요? 그냥 주관적으로요, 하시모토 씨 생각이라도 말해줘요. 저는 좀, 많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오늘 굳이 찾아온 이유도 이것 때문이고요. 하시모토 씨라면 가장 냉정하게 이 상황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보고싶기도 했던 거겠죠, 안 그래요? …쓸데없는 생각 핮 말라고요? 네, 네. 그만 갈게요. 잘 자요. …아, 무시하지 말고요!

 

 …하시모토 씨, 하시모토 씨! 일어나세요, 악몽이라도 꿨어요? 무슨 식은땀을 이렇게‥ 야, 백발. 하시모토 씨? 너, 너 말이야. 대체 뭘 한 거야? 하시모토 씨, 진정 좀 하세요. 일단 차분하게… 내가 그럴 수 있게 생겼어? 왜 스스로 그 행복을 걷어찬 건데? ‥뭐라고요? 아니, 하… 다시 좀 주무세요, 좀 있다가 다시 깨울게요. 그래, 그래야지. 많이 안 좋으면 쉬어도 돼요, 하루 정도는 그분도… 용서하실 테니까. 백발. 전 이제 가볼게요.

 하시모토 씨, 후회하진 않으세요? 언젠가 당신과 제가 만났던, 결국 당신을 끌어들였던 나를 원망하진 않아요? 당신을 위해서라며 절망에 물든 나를 두려워하지는 않을 건가요? 하시모토 씨는 언제든 나를 떠날 수 있어요, 저와는 다르게요. 하시모토 씨는 훨씬 우위에 있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내 절망은 당신을 위한 거니까.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어떤 절망도 이겨내고 더 거센 절망을 만들어낼 수 있어요. 모순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당신은 저를 잘 알고 있잖아요. 하시모토 씨, 저는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어요. 그분을 위한 게 아니에요. 저는 당신을 위해 이렇게 하려는 거예요. 이런 저를 사랑하지 않을 거에요? 아니잖아요, 이미 다 알고 있는걸요.

 …이제 그만, 잘게요. 잘 자요, 내일 또 만나요.

 

 해가 늬엿늬엿 지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난 것에 어이가 없었다. 겨우 그런 꿈을 꿨다고 윽박을 지르기나 했다는 사실이 조금 낯간지러워서 네 얼굴을 어떻게 봐야할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네 자리를 봤다. 없었다. 문장 그대로의 의미였다. 줄곧 차리를 채웠던 너의 온기가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시간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급하게 몸을 일으켜 머리를 찔러오는 두통에 눈을 찌푸리면서도 두 눈으로 너를 좇았다. 너를 찾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다. 어떤 것에도 의미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하시모토 씨? 이제 일어나셨네요. 너, 대체 어딜 갔던 거야? 어딜 갔냐뇨, 하시모토 씨가 쉬어서 빠진 일을 채우러 갔어요. 양산형 모노쿠마한테 어떻게 하시모토 씨가 할 일을 맡겨요? 오늘은 네 차례 아니잖아. 분명 쉰다고 했었어, 백발. 하지만 하시모토 씨가 너무 곤히 잠들어 있어서요, 깨우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시잖아요. 오늘 일까지 너한테 미룰 만큼 피곤하진 않았어. 네, 네. 일부러 안 깨웠어요. 오랜만에 좀 쉬시라고요. 쉬는 건 좋아하시잖아요, 네? 됐어, 다음에 피곤할 때 대타 설 테니까 말해. 알겠어요. …아, 하시모토 씨. 왜. 묻고 싶은게 있는데요. 아까 말이예요. 아까 뭘, 내가 무슨 말이라도 했나? 아뇨, 기억 안 나면 됐어요. 중요한 말도 아니었고. 그래, 그럼 됐어.

 억지로 모르는 척을 하는 이유랄 것은 없었지만 굳이 이유가 있다면 내가 당장 그 꿈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네가 내 앞에서까지 숨기려 애쓰는 과거를 굳이 기억해서 너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었다. 애써 힘들여 온전한 절망과 함께 스스로를 얻은 너에게 과거를 꺼낸다는 것은 너를, 소라 라는 인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너를 더 잃고 싶지는 않았다. 마구잡이로 파헤쳐 둔 너의 과거를 소중한 듯 쌓아올린 나에게 어쩌면 나는 너의 과거를 너보다 훨씬 많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너는 그것을 다시 받아들 그 순간에 무너질 것 같았다. 이때까지 부정해 온 모든 것을 잃고는 떨어져버릴 것 같았다. 나는 두려웠다. 화가 난 것도 아니었는데 화를 내는 것처럼 네 이름을 덮어 두고 백발이라며, 괜히 그때의 내가 부르던 너처럼 너를 계속 불렀다. 너를 잊지 않으려면 나는 너를 부르던 그 시절을 상기시켜야만 했다. 나를 위해 부러 절망을 잡은 너를 놓칠 수가 없었다. 너를 사랑하지 않을 일이 없다고 확신하는 네 모습이 맑아서였는지 억지로 화를 내려고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나의 탁한 세계로 빠져든 너는 나마저 그 깨끗할 정도로 맑은 절망으로 나를 빠트리고 나를 안은 채 결국 그 손으로 침몰을 택했다.

 내 세계는 너의 절망 뿐이었다. 너의 절망과 너 하나라는 것만으로도 탁한 나의 세계는 맑아져 빛을 내었다. 나는 너를 위해서 절망을 택한 것이었다. 절망이라는 것 따위에 스스로를 팔아버릴 정도로 나는 나의 가치를 판단하고 결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너는 알고 있음에도 모르는 척 외면했을지도 모른다. 탁해진 나의 세계에 네가 내린다. 너라는 절망이, 너라는 사람이 흐드러져서 슬프지 않을 리 없는 모습인데도 나는 너라는 것에 그저 안도하여 슬며시 그 아래에서 너를 맞았다. 나는 너와 분명히 몰락할 것이다. 너는 나에게 그럴 가치가 있었다. 너는 나의 가치를 정리한 신뢰였다. 모든 것을 준다고 해도 나는 너와의 신뢰를 버릴 수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에 더 이상 너보다 높은 가치를 매길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다만 너를 위해 살고 버텼다. 너를 위해서 살았다. 나는 이미 너라는 존재에 묻혀서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너와 함께 담배 연기를 머금고 뱉는다. 매캐하고 희게 피어오르는 너의 연기는 그마저 너를 닮아 있었다. 그래,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을 방법 따위는 없었다.

 

그것 또한 이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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